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단명의 신학교 - 성화(聖化)신학교, 남산현예배당이 성화신학교의 중심 場
관리자 2014-07-11 12:10:25 129


                              <성화신학교,1회졸업식, 1949년 7월 6일, 평양남산현예배당 전경사진> 

 

한국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단명의 신학교 - 성화(聖化)신학교

 

남산현예배당이 성화신학교의 중심된 場

 

평양 남산현에 설립되었던 성화신학교는 감리교 서부연회에서 직영한 신학교로서 1946년 9월에 설립되었다가 1950년 3월경에 폐교된 단명의 신학교육기관이었다. 이사장 송정근, 교장 배덕영, 교수 박대선, 이재면 김두성, 김용련 윤창덕 등이었다. 비록 감리교라는 교파신학교였으나 장로교의 소속 학생이 더 많이 들어와 공부한 학교로도 유명했는데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북한지역에는 감리교회보다 장로교회가 훨씬 많았고, 2) 성화신학교 교수 중에는 장로회 목사(이재면)도 있었으며, 3) 장로회 신학교도 평양에 있었으나 장로회 신학교에는 30~40대의 현직조사 전도사들이 목사안수를 받기 이한 공부였고, 성화신학교는 기독교신자라는 그 한 가지 죄로 인해 고등, 전문대학에서 퇴학당한 젊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성향으로 들어와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4)공산치하에서 목숨을 걸고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에서 장로교, 감리교파가 있을 수 없었고 오직 뜨거운 열정으로 뭉친 신앙의 일체감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학생이 본과, 예과, 고성과 합해서 무려 600여명이 들어와 공부하고 있었다.

1946년 9월 3년제로 받은 제 1회 학생들은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1949년 7월 6일 졸업장을 받고 교문을 나왔다.

그러나 그해 12월 남산현교회에서 개최되었던 학생들의 성탄 축하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배영덕 교장이 공산당에게 납치되어가고 1950년부터 장로회 신학교와 성화신학교를 폐교 시킨후 양 신학교 학생 120명을 추려서 새로운 신학교를 만든다는 공산정권의 흉계를 알아차린 성화신학교에서는 박대선 교장대리의 지도로 50년 가을절업예정자를 한 학기 앞당겨 봄에 졸업시킨 후 폐교하고 말았다. 졸업생은 1회20명, 2회11명 모두 31명이었고 재학생으로 월남하여남한의 신학교에서 졸업한 신학생은 수백명에 달할 것이다. 1.2회 졸업생 중에는 북한에서 순교한 이응교, 김익두 등이 있고, 월남하여 감독을 지낸 최상봉 목사와 백명호 감독이 있으며, 은퇴한 이로는 한승호, 안덕창. 백만국, 이성해, 화원섭, 백기준, 김덕순, 이재선, 강일화 등이 있다. 현역으로는 윤영봉, 조동역, 아는섭 목사 등이 있고, 그 밖에도 남한에 내려와 서울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성결교회에서 목회한 이현영, 일본 침례교 목사가 된 백동호, 예수교회 목사 김희방, 장로회 목사로는 우영낙. 이시문, 고운용, 이승만 등이 있는데, 그 중에 신현균 목사는 한국 교계의 부흥사로써 큰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

신학계에도 영향이 적지않다. 감리교신학대학장을 지내고 별세한 변선환 박사, 대전신학교 교수로 별세한 최모순 교수,연세대에서 은퇴한 후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 이계준 목사 등이 학계에 끼친 영향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 글 인용 : 윤춘병 감독/감리교비사11,주간 기독교세계 98.10.17.

       
한국기독교 최초목사 - 평양남산현감리교회의 김창식 목사님 관리자 201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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