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눈 쓸은 마당 남산현예배당: 성화신학대학교 회고문 (1949.12,헨델’메시야연주)
관리자 2014-04-11 18:53:08 70

현재 증언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국 최초 메시야 연주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기술이 있습니다. 사진이나, 악보나 그밖의 자료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증언이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1949년 12월 19일 금요일 저녁, 평양남산현예배당에서 평양성화신학교 신학생성가대의 ‘헨델의 메시야’ 연주에 대한 고 박대선 감독님 추모기도회의 기록을 올립니다. 요약하면,

“1949년 12월 19일, 저녁, 평양 남산현예배당 평양성화신학교 신학생성가대, 헨델의 메시야전곡 연주 ‘헨델의 메시야’ 곡, 박대선 감독의 부인 반주”


두고 온 성화 신학교 (金光植 목사 / 당시 예과 2년 / 인천 제삼교회 원로목사)

1. 출생에서 성화신학교

저는 평남 강서(平南 江西) 고창교회(高昌敎會)출신입니다. 고창교회는 1896년에 창립된 교회로 부흥사로 유명한 길선주(吉善宙) 목사님(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독립운동가 33인중 한분)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다가 소천하신 교회입니다.

저는 증조부 조부, 부친 3대가 장로이셨고 제가 4대째 목사가 되었으면 하여 가정예배 시 마다 기도를 하셨으며 제에게 직접 권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조들의 뒤를 이어 장로가 되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목사가 되는 일은 모든 면에 부족하다고 느껴져 부모님의 요구에 허락하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광성학교를 졸업하고 평고 재학 중에 자퇴를 하였습니다. 학생 시 축구선수였는데 광성학교는 물론 평고 때는 축구부 주장을 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 중에는 월남하여 국가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이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제가 평고를 자퇴한 것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학교 교수회에서 자주 문제가 되어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이 사실을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학교 방침에 따르든가 아니면 자퇴하라”고 하시면서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신변에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동안 고민을 하다가 졸업을 못하고 자퇴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마을의 유지 되시는 분이 저에게 자네는 학교도 다니지 않고 직장도 없다는 등 “세포회의”에서 문제인물로 지목하고 있으니 빨리 거취를 정하라고 귀뜸을 해주었습니다.

이 때 부모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면서 신학교에 가도록 권하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한 일이 별로 없었던 제가 단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뜻에서 목사는 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신학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당연히 전통적인 장로교 가정이기 때문에 평양신학교에 가서 입학여부를 물었더니 입학시험이 이미 끝났다기에 저는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부모님은 성화신학교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성화신학교는 감리교 신학교이나 장로교 출신학생들이 상당수가 있었습니다.

성화 신학교를 찾아갔더니 마침 보결시험이 있어서 대충시험을 치루었는데 다행이도 합격이 되어 입학수속을 하라는 통지가 왔습니다. 저는 시험을 친 후 신학교에 가는 일이 부담이 되어 집에서 떠나 피하여 있었기 때문에 늦게야 학교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학생처장으로 계셨고 감리교 신학대학학장으로 계시다가 81년에 작고하신 김용옥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입학등록 기일이 지났으니 학생은 우리 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소.” 하시면서 앞으로 학칙에 어긋나면 무조건 자동으로 퇴학이라는 각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 간신히 입학을 하게 된 것이 제가 성화신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요 사연이기도 합니다.

2. 성화신학교와 나의 변화

성화 신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광성학교와 평고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들이 여럿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성화신학교는 학구열이 대단했으며 경건의 훈련이 철저했으므로 저는 열심히 기도하여 은혜 받고 성령을 받으면서 저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경건회 시간 중 배덕영 교장 목사님의 명확한 발음과 품위 있는 깊은 내용의 설교 말씀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생존하여 계시면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신 박대선 목사님의 말씀과 교훈, 이재면 목사님, 김학수 장로님, 그리고 교실에 들어서면서 “버들강아지 쭉쭉 늘어져 바람에 흔들려 내 얼굴에 스치는데” 어쩌구 저쩌구 시간마다 시를 읊으시는 오하동 선생님, 그 외 여러 교수님들의 학문적으로, 신학적으로, 영적인 면에 있어서 말씀과 교훈이 저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여 마침내 저의 생각과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949년 12월 16일(金) 저녁에 남산현감리교회에서 “헨델의 메시야 연주”가 성대하게 있었는데 그 당시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어려운 시기였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으로 공연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김용옥 목사님께서 오랜 기간 동안 연습을 시키셨고 실제로 공연 시는 이재면 목사님께서 매시야 전곡을 지휘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날 참석한 학생들과 신도들은 크게 감격하였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밤에 배덕영 목사님께서 공산당에게 체포가 되었고 그 후 학교는 당국으로부터 강제로 폐교가 되었습니다.

진남포 득신고등성경학교 교장이셨던 조순천 목사님께서 이 메시야 공연에 참석하고 귀가중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한승호 목사님께서는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매 과마다 학생들에게 처음부터 암기를 시키시며 한 목사님 자신이 먼저 암기를 하시면 교실은 금시 조용했습니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시던 한 목사님 지금도 뵈올 때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느꼈으며, 자연히 생활에 적용되었습니다. 부모님의 권유로 그것도 조건부로 성화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결국은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하셨으며 세월은 흘러 42년의 목회를 끝내고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였으니 강권하여 사역케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3. 42년의 목회와 은퇴

1‧4후퇴 시 월남한 저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 그 때마다 기도하기를 살려주시기만 하면 조건부가 아닌 자진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겠다고 매달렸습니다. 1958년도에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금년이 바로 48년이 되는 해입니다. 부모님께서 기도하시며 소원하신대로 이루어진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목회는 신학교 졸업반 때 서울후암교회에서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로 16년을 시무하였으며 1972년 6월에 인천제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24년을 시무한 후 정년이 되어 1995년 말 원로 목사로 은퇴를 하였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을 때는 이 소식을 이북에 계신 부모님께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며 금번 목회를 잘 마치고 은퇴하면서 또 하번 이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연세로 보아 천국에 가셨으리라고 생각되나 57년 전 헤어질 때의 부모님의 모습이 그래도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4대째 신앙을 지켜온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음을 깊이 감사드리며, 성화신학교에서 주님의 종이 되게끔 싹이 트도록 가르쳐 주셨고 결단을 내리게끔 인도하여 주셨음에 대한 고마움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오늘이 있도록 키워주시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성화의 어르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성화의 이 아름다운 전통이 변함없이 계속되어 주님의 뜻이 더욱 크게 이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남산현예배당 예배실내부 관리자 2014.04.11
남산현교회 문, 벽, 지붕 관리자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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