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현 교회와 평양의 선교부
관리자 2014-04-11 18:27:54 62

<남산현 교회와 평양의 선교부> -기독교타임즈 2002.09.23(월)

서문 밖에 있었던 감리교회에는 청일전쟁이후 해마다 교회를 증축해야 할 정도로 교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특히 1896년 부임한 노블(W.A.Noble)선교사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그 증가폭이 훨씬 두드러졌다.

한옥 집의 형태였던 초기의 예배당은 방을 헐어 늘려 나가거나 방을 새로 짓는 방식으로 예배당을 증축하였으나 밀려오는 교인들을 수용할 수 없었다.

1897년에는 44명이 세례를 받는 예식이 있었는데 집례하는 노블이 사람들을 올라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비좁았다. 이런 형편이어서 시간을 나누어서 예배를 드렸으나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체교인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는 방문을 열고 예배를 드렸다.

늦게 온 교인들은 할 수 없이 마당에 깔아 논 멍석에 앉거나 아니면 서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1900년 노블은 연례회의에 참석하여 평양 감리교회의 눈부신 부흥을 보고하면서 적어도 6백명 이상은 들어갈 수 있는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교인들이 계속 증가하여 그 배인 1천2백명이 들어갈 정도여야 한다고 보고하고 조속한 건축을 시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회의를 주재하러 온 무어(D.H.Moore)감독은 이 계획을 승인하면서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기공예배를 주재하였다. 감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8백명이 넘는 교인들이 다 나와 멀리서부터 도열하여 감독을 맞았다. 그리고 남여를 구분하게 마당에 질서있게 앉아 감독의 설교를 들었다. 무어 감독은 평양교인들의 역동적인 신앙에 무척 고무되어 이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미국에 돌아간 감독은 사진과 함께 한국교회의 열정을 소개하면서 미국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었고, 노블 역시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하여 적지 않은 선교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새로 지은 예배당은 1903년 평양의 중심인 남산에 완공되었다. 건물은 서양식 붉은 벽돌집으로 1백50평 정도의 규모였다. 그 때야 맨 바닥에 앉으면 1천명은 능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노블은 이 예배당이 감리교와 장로교회를 통틀어서 제일 큰 예배당이라 자랑하였다.

평양의 중심지 남산에 우뚝 선 남산현 교회는 평양이 기독교 도시라는 것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깃발과 같았다. 더욱이 대문은 우리 고유의 전통양식인 기와지붕으로 고풍스럽게 지었고, 예배당 앞에 별도로 높은 종탑을 쌓아 전체적인 조화가 돋보이게 하였다.

남산현 교회에서 보면 평양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고, 반대로 산밑 평양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서도 이 교회가 보일 정도였다. 그 때야 어디 서양식 건물이 전무한 상태였으므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것은 당연하였다.

산 위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평양주민들의 심령을 깨우기에 충분하였다.

북한의 교인들은 이 예배당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평양에 오면 순례자처럼 이 교회를 들려 구경하고 하였다. 예배당 그 자체가 선교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였던 시대였다.

1900년대 들어서 평양의 중심부인 남산 일대는 남산현 교회를 중심으로 감리교 선교기지(Station)가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교회 주변에 넓게 자리잡은 노블의 한옥 주택이 있었고, 남산현 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식 벽돌의 여선교사 주택도 들어섰다.

이미 건축되었던 기홀병원과 광혜여원, 그 부속 건물로 평양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던 에스 마가렛 어린이 병동이 들어서 있었다. 또 서양식 건물은 아니지만 남자와 여자를 학교가 그 자리를 점점 넓혀 가고 있었다.

       
남산현교회 주위는 평양의 감리교타운 관리자 2014.04.11
3.1운동, 핵심지 남산현교회 (그림 - 혜촌 김학수 화백) 관리자 2014.04.11
 
 
 

위로 이동